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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저널리즘

한국의 포토저널리즘

by 淸風明月 2013. 3. 3.

 


한국의 포토저널리즘
1) 사진술이 전래된 시대적 배경

사진술의 도입
한국에 사진술이 도입된 시기는 1875년 강화도조약체결 이후이다. 조약체결로 다음해 부산·인천·원산 등 세 항구가 개항되었을 뿐 아니라 김기수를 비롯한 조선대표단 75명이 일본과 서양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왔다. 즉 일본과 이미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 사진술이 들어왔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1839년 8월 19일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술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공포된지 37년만에 한국에도 사진술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1880년 고종의 수신사로 김홍집 들 58명과 1881년 박정양, 어윤중 등 10여명이 일본을 다녀왔고, 김윤식등 69명이 청나라를 왕래했다. 이러한 활발한 방문으로 인해 조선에도 개화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일본군 장교를 교관으로 하는 별기군 제도가 생겼고 정부기구와 조직은 청국을 본따 개편을 했다. 서양의 강대국들도 통상을 요구, 1882년 미국과 수호조역을 맺었고 이어서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덴마크, 벨기에 등과도 수호조약을 맺게 되자 서양의 외교관, 상인, 종교, 군인 등이 수없이 들어왔다. 1883년 민영익(閔泳翊)을 단장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이 미국에 갔을 때 인물사진을 찍어왔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진술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 이때 통역을 맡았던 로웰(P.Lowell)이 조선의 풍물을 찍어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 The Land of Morning Calm, A Sketch Korea)을 발간하여 서양에 우리나라를 소개했다. 중국과 일본에는 우리보다 먼저 사진술이 도입됐다. 중국은 일찍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보다 먼저 들어왔고 일본도 활발한 해상무역을 이용, 1850년대 사진술을 들여온 것으로 보고 있다. 1860년대에 일본에 사진관이 생겼다는 것을 보면 그 시기가 맞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 사진술이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가. 대륙을 통한 유입인가, 아니면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인가.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는 기록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강화조약 이후 모든 문물이 항구를 통해 들어왔으므로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는 설이 맞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問)에 1885년(고종 22년) 일본으로부터 사진기계류·직물·의약품 등을 면세로 수입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 초기사진의 선각자들
강화조약 이후 조선은 세계열강들과 빈번하게 외교접촉을 했다. 특히 중국, 일본과의 외교활동이 더욱 강화되어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의 통산외교는 신문물 도입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중에 사진에 집념을 가졌던 두 수신사 수행원이 있었다. 한성순보 1884년 2월 14일치에 1883년 여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간 김용원(金鏞元)이 일본 사진사 本多修之輔를 초빙하여 중구 저동에 촬영국을 개설했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그리고 같은 해 봄에는 통리국군아문주사를 지낸 지운영(池運永)이 일본에 다녀와 종로3가에 촬영국을 설치하여 일반인을 상대로 영업활동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지운영이 일본에 가서 직접 사진기술을 배우고 사진기재를 구입했다는 기사를 보 면 그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진술을 전수받은 것이 된다. 그는 서화에도 능통하여 당시 삼절(三絶) 칭호를 받고 있었다. 인물사진의 선각자는 영친왕의 서예사부(師傅)였던 서화가 김규진(金圭鎭)을 들 수 있다. 그는 왕실의 명을 받아 1902년에 일본에 가 1년동안 사진술을 배워와 창덕궁에 어전촬영소를 개설하고 궁중의 초상사진을 전담했다. 김규진은 은퇴한 뒤 1913년에 소공동에 천연당 사진관을 차려 사진술의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이처럼 한국사진술의 선각자 세사람은 모두 예술계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 서화계의 대가였다.

사진술도입 이전의 조선조 후기
사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사실적 기법인 회화가 포토저널리즘을 선도한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양반계급의 취미생활에서 비롯된 사군자는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을 주창하던 지배 계급이 여가를 즐기는 풍류의 한 표현방법이었다. 중국의 문물을 그대로 답습한 선대의 지도층 세력들이 풍류로 즐기던 서권기·문자향이 한국신문의 원조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사군자에 한정되어서 시(詩)와 서(書)를 일맥상통하는 언어로 표출한 것이 다소 확실하기 때문이다. 현대신문의 기사와 사진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사군자나 문인화라고 본다면 회화는 신문기사의 기능보다는 포토저널리즘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회화에서 나온 것이 사진이고 보면 이런 가설이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다. 동서 역사 기록을 보면 통상사절이 외국을 방문할 경우 상대국의 문물을 기록하기 위한 일종의 수행문사와 스케치 담당 화가를 함께 데리고 다녔다.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절단이 상대국에 도착하여 궁성으로 향하는 장면을 그린 수신사 행렬도나 풍물화가 일종의 보도적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볼 때 이것이 바로 포토저널리즘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동서양의 고대 토호들의 초상화나 실경산수화도 거의 사진기법에 가까운 사실주의 회화이다. 사진이 들어오기 이전에 사실주의적 화풍의 회화는 조선조 후기에 등장한 풍속화에서 비롯됐다. 풍속화는 현실을 중요시하고 서민생활의 애환을 회화형식을 빌려 솔직하게 표현한 것으로, 사군자나 문인화보다 한층 발전된 사진의 전단계로 볼 수 있겠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의 회화에 나타난 생활의 표현이 오늘의 사진기법과 동일선상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상·공·농·(商·工·農) 서민사회의 저변에 깔린 사회 풍자적 표현으로 캔디드 기법에 가까운 것인데 반해 혜원 신윤복의 것은 인물중심의 춘화에 가까운 풍속화이다. 그가 리얼하게 묘사한 남녀의 사랑행위는 100년후를 내다본 안목이었다. 남녀간의 섹스신 그림은 오늘날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사진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주의 회화기법이 우리나라 사진술의 근간이었음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그들이 현대 사진가의 소재나 주제를 골로루 갖춘 회화기법으로 당시의 풍속을 표현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서구에서도 사실주의가 사진을 선도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예부터 사진의 기운이 회화속에 감돌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2) 초창기 한국신문과 포토저널리즘

한국 포토저널리즘의 태동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인쇄술이 발달한데 비해 신문의 발달은 늦었다. 1883년(고종20년) 10월 31일에 가서야 박영효·유길준 등의 주장으로 정부에 박문국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순한문만으로 쓴 한성순보라는 관보를 발간했다. 물론 사진은 단 한장도 실리지 않았으며 다만 창간호에 동서양(6대륙)이 그려진 세계지도를 게재했다. 이것은 지구전도(地球全圖)라고 표제를 붙여 목판화로 인쇄했다. 1886년 1월25일 한성순보는 한성주보로 제호를 바꾸면서 국한문 혼용의 새로운 체제로 간행되었다. 그후 서재필을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협회는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독립신문은 전면 4페이지로 주3회 1일 300부씩 발행됐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776호를 끝으로 정부에 너무 비판·공격적이라는 이유로 3년 9개월만에 폐간되었다.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한 것은 이 신문이 자유·민주정신과 개화사상으로 민중을 계몽했기 때문에 그 취지를 기리는 것이다. 한성주보가 발행되던 시기에는 기독교 전파를 위해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왔다. 그 중에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부인을 꼽을 수 있다. 언더우드는 연세대학교와 새문안교회, 아펜젤러는 한국감리교회 및 배재학당, 스크랜튼 부인은 이화학당을 각각 설립했다. 그들은 전도를 하는 한편 학교, 병원, 신문사 등을 세워 뒤떨어진 생활을 개선하고 근대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공헌했다. 미국인 H.G. 언더우드는 1897년 4월 1일 순한문 주간지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하였다. 목판으로 인쇄된 창간호에는 고종의 사진을 게재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사진이다. 이 신문은 이어서 건물(동대문)과 풍물(대한경도)을 촬영, 신문에 보도하여 한국포토저널리즘의 초석이 되었다. 그리스도신문을 인쇄한 배재학당 인쇄소는 구텐베르크의 납활자를 사용했으며, 목판에서부터 석판·동판을 이용한 현대적인 인쇄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1898년 협성회보,경성신문을 비롯하여 이종일의 뎨국신문, 남궁억의 황성신문과 광무협회의 대한신보 등이 모두 같은 해에 창간되었다.

이어서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과 양기탁이 대한매일신보, 손병희 등 천도교 간부들이 만세보, 대한협회가 대한민보, 미국인 헐버트가 코리아 리뷰등을 창간하여 초창기 한국신문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이 가운데 대한민보가 사장 오세창의 인물사진을 게재했고, 코리아 리뷰에도 풍물사진이 게재되어 포토저널리즘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일본과 서양문물이 견문록 기사를 통해 보도되어 사진술에도 점점 서광이 비쳤다. 이 시기의 신문들은 대부분 열악한 제작여건과 경영미숙, 자금조달 등의 한계에 부딪혀 신문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구한말 외국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나라의 현실을 개탄하고 국민을 계몽·선도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당시 신문들은 문명 개화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으로 일관되어, 신문 본래의 사명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특히 황성신문은 장지연이 쓴 을사조약을 개탄한 이 날을 목놓아 크게 운다라는 사설을 실어 정간당하는 등 일제 통감부에 의해 수많은 탄압을 받았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1884년 개화당의 요인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서재필 박사가 미국 시민권을 얻고 돌아와 외부(내무부)고문을 역임, 우리나라의 독립과 국민계몽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이와 뜻을 같이한 국내인사 30여명을 모아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단체인 독립협회는 1896년 4월 7일부터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국민에게 자유·민주정신과 개화사상을 불어넣고 과거에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사대주의 상징인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쳐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강연회장으로 썼다. 1896년 11월에는 또 다른 사대주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어 없애고 근처에 새로 독립문을 세워 국민에게 자주와 독립사상을 일깨웠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이승만 등 진보적인 인물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독립신문과 강연회를 통해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독립협회의 활동이 국민의 호응을 받고 있을 때 고종과 세자 및 박정양 내각이 러시아 공관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화를 거부하자, 1896년 12월 독립협회는 국왕이궁궐로 돌아갈 것과 황제 칭호 및 새 연호를 사용할 것을 요구 했다. 이 요구는 국민적 호응을 얻어 이에 고무된 박정양 내각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덕수궁)에 거처하게 된다. 그해 8월부터 광무라는 연호를 쓰고 10월에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함께 국호도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이때부터 조선을 대한제국, 고종을 고종황제 또는 광무제로, 을미사변때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민비를 명성황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독립협회가 생긴 이후 국내에 많은 사회단체들이 결성되었지만 정부에 가장 비판적인 단체는 독립협회였다. 때문에 정부는 보부상들을 중심으로 한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만들어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했다. 독립협회는 결국 강압으로 해산되었으나, 언론·결사·집회 등을 통해 독립정신과 개화사상을 고양시킨 점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독립신문은 재정의 어려움으로 인한 악조건 속에서 인쇄됐기 때문에 포토저널리즘의 영역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3)한국신문의 암흑기와 포토저널리즘

대한민보와 포토저널리즘
1907년 7월 24일 이완용 내각은 민족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광무신문지법을 공포, 항일의 선봉에 있던,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했다. 또한 한반도 침략을 합리화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선정하는 대변지로 1909년 6월 대한일보를 창간했으며,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대동일보, 경남일보, 시사신문, 대한일일신문 등을 허가해 주었다. 1909년 6월 2일 애국적 사회단체인 대한협회가 오세창, 장효근을 중심으로 대한민보를 창간했다. 인쇄는 홍사단 소속의 동문관에서 맡았다. 대한민보는 창간호부터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행위를 공격했다. 이듬해 한일합방으로 창간 1년만에 폐간 당할 때까지 일반민중에게 애국애족 정신을 일깨우려 최선을 다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대한민보는 그 당시 타지들과 비교할 때 획기적인 편집을 시도했다. 창간호부터 이도영(李道榮)화백의 풍자적인 삽화를 기사와 함께 게재했으며, 만화를 넣어 시각적 효과를 노린 진보적 편집을 시도했다. 특히 신문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도입하여 사진의 역할과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데 일조했고, 광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 광고면에 사진을 이용했다. 1909년 8월 한강에서 보트를 빌려 보트놀이를 한다는 광고를 사진과 함께 게재하여 최초로 신문 사진광고의 장을 열었다. 이때 게재되었던 광고사진은 신기술과 기자재의 소개로 대부분 일본기업의 광고였으며 한국상권을 지배하려는 일본 기업의 본격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신문에 등장한 광고사진은 보도사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를 마련했다. 민족신문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했지만 대한민보 같은 진보적인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의 시설로서는 손꼽히던 동문관이 자회사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제반여건이 타민족지에 비해 다소 좋았던 대한민보가 사진술을 도입하여 신문제작에 활용한 것은 기록될만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6월 7일 대한민보는 발행인 오세창의 인물사진을 제호 밑에 넣어 보도했다. 이 보도는 일간지로서는 최초로 게재된 인물사진이다. 이 인쇄는 망판을 이용한 인쇄가 아닌 재래식 석판인쇄였기 때문에 인쇄효과는 떨어지지만 당시 인쇄술로서는 신기술을 도입한 대단한 발전이었다.

한일합방과 매일 신보
한일합방을 앞두고 1910년 7월 통감부의 경부총감은 각 언록사에 보도통제 조치를 통고한다.
① 의병에 대하여 은영중에 동정이나 선동 금지 ② 한일관계를 이간시키는 민심의 선동 금지 ③ 개인 또는 단체간의 악감정을 유발, 사회질서 문란행위를 금지 ④ 억측·추측기사 금지등 보도통제 조처를 취했으나 민족지들이 강경한 논조를 굽힐 줄 모르자 이종린등 28명을 검거, 구금하는 한편 하나 둘 민족지를 폐간시켰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8월 28일(지령, 1,461호), 대한민보는 1910년 8월 31일(357호), 황성신문은 1910년 9월 14일(3,470호)에 폐간됐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간교에 의해 그들의 기관지로 강탈되어 제호를 대한은 빼고 매일신보로 바꾸어 발행되는 수모도 당한다.

1910년 8월 29일을 전후해서 폐간된 다수의 민족지가 일제의 강권과 탄압, 통제에 묶여 발행이 중단된 1920년까지 한국 유일의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매일신보 뿐이었다. 일제는 이 신문을 그들의 식민지 정책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계층의 지도적인 한인 덕망가와 사상가를 회유하거나 동참을 묵인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한일합방 이전의 친일세력에다가 합방 이후 매일신보를 통한 친일세력을 키우는 데 이 신문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매일신보가 일제의 사주에 의해 왜곡되고 또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보도를 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수단이었고, 그 외는 한인들에게 유익한 기능을 했다. 예를 들면 낙후된 생활풍습을 개선하거나 선진 서양의 신문물을 보도 계몽하는 등 세계 정세에 어두웠던 민중들에게 그들의 사고와 판단을 돕는데 일조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서양의 신문물을 받은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급속도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기술을 개발하여 유럽 선진국에 버금갈 정도로 발전했다.

이들은 낙후된 신문사에 필요한 새로운 기재를 도입해서 현대화시켰으며 편집도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사진과 삽화와 만화 등을 게재하여 현대적인 신문 제작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신문에 사진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은 큰 변화이자 한국 보도사진의 기틀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일제의 보도검열제도하에서 한민족에 관한 미묘한 사안에 대해서는 통제를 받았으나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그날의 뉴스를 신문 지면에 차츰 정착시키면서부터 사진의 뉴스성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또 현대화된 신기재를 갖춘 매일신보가 그 동안 열악한 조건에서 발행되었던 민족지들에 비해 선명하게 인쇄되어 나오자 뉴스와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보도사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대전환을 이루었다. 매일신보에 종사했던 언론인들이 후에 민족지가 다시 창간되기 시작한 1920년대 언론의 중추역할을 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언론의 암흑시대에 유일한 국한문 혼용 신문이었던 매일신보는 일제의 정치· 경제·사회·문화정책 선전도구였으나 뉴스와 보도사진의 놀라운 효과를 인식한 한국인들에게 미래의 한국언론을 준비할 커다란 경험을 주게 되었다. 매일신보는 1910년 11월 3일 1면에 일본 명치(明治)왕의 인물사진과 왕궁으로 건너가는 다리사진을 게재했다. 이 사진은 매일신보가 생긴 이래 최초로 보도된 사진이었지만 이 사진을 시작으로 뉴스사진을 잇따라 게재하기 시작했다. 1910년 11월 11일에는 '百四歲의 老夫婦'라는 제목으로 인천에 사는 104세 이춘광(李春光)부부의 일상생활을 사진과 함께 3면에 보도했다. 한편 편집국에 소수인원으로 사진반을 만들어 사진의 중요성을 반영했다. 신문에 사진이 등장한 것은 사진술이 도입된 직후의 일이겠으나 그것이 보도를 목적으로 한 보도사진이었느냐 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하겠다. 증명사진이라도 보도를 목적으로 게재한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보도사진이 아니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1910년 11월 3일 게재된 명치왕 사진이 신문에 보도되기 전에 여러가지 형태로 많은 출판물에 이미 게재됐던 관청의 공보사진 자료임을 내세워 뉴스 사진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필자는 비록 기록을 위해 찍은 사진이었다 할지라도 보도를 위한 사진으로 쓰였다면 이것은 보도사진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명치왕은 신적인 존재였으므로 사진기자가 그의 사진을 촬영할 수 없었고 전속 사진가가 찍은 사진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사진이 다른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뉴스의 초점이 되었던 사진을 조사 자료실에 보관했다가 다시 찾아 쓰는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그 사진도 보도사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매일신보는 정치면 이외에는 비교적 유연한 편집을 시도하여 국민을 포옹하려 했다. 주로 뒤떨어진 생활풍습을 지적하여 계몽을 펼쳤으며 한일합방다음해부터는 많은 양의 사진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뉴스가치가 있는 보도사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진이 처음 게재되어 발행되는 신문이라서 민중에게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일제하의 보도 영역의 한계 때문이었겠으나 편집자의 기획물이라고는 스케치 형식의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계절을 나타내는 사진이었으며 다음으로는 명승고적을 촬영 보도했다. 예를 들면 봄을 나타내는 봄사진으로는 창덕궁의 어원이나 남산공원의 전경 등이 있었고 지역적으로는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부산·대구·경주·목포 등을 촬영 취재하여 보도한 사진들이었다.

여름 가을 겨울도 봄과 마찬가지로 고정지역인 한강, 압록강, 대동강, 금강지역의 사계가 주소재로, 강과 고궁을 벗어나지 못했다. 2~3명의 사진기자가 전국을 맡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취재하기 편한 곳만 택해 촬영 보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진을 자주 게재하여 보는 신문으로는 편집을 시도했지만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진편집자가 사진의 중요성을 감안하지 않고 다만 독자들에게 시각적 효과를 주기 위한 방법으로 사진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설명도 없는 사진이 실리는 일도 허다했다. 매일신보는 매우 특이한 계획을 세웠다. 뉴스사진이라는 표제아래 연재된 시리즈 사진물이 그것인데 독자들의 호기심을 꽤 자극했다. 1911년 7월 9일부터 시작된 주요기획시리즈 사진현황을 보면 '동경 서 보' 10회, 제국의 위력 27회, '李喜公장의' 8회, '寒生涯' 10회, '여자의 직업' 13회, '촬영의 일순간' 10회등을 들 수 있다. 초창기 우리나라의 신문 실정으로 볼 때 매우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사진이라는 신문물이 국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1913년 1월부터 연재한 '寒生涯'는 엄동설한에도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업인을 다양하게 게재했다. 이와 같이 사진을 연재한 기획물들은 보도사진을 체계화하고 발전시켜 우리나라 포토저널리즘을 정착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기할만한 사안은 촬영의 일순간이란 제목으로 10회 연재된 사진이다. 그때까지 모든 신문에서는 생동감 없이 정지된 상태의 사진만을 게재하고 있었다. 앞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사진은 모두 증명사진 같았고, 전신 사진의 경우는 모두 뻣뻣하게 서 있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이 연재물은 모두 움직이고 있는 자연스런 모습을 촬영하여 게재하고 있다. 이 시도는 혁명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었고 보도사진에 있어서 진일보한 발전이었던 것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촬영되어 신문에 게재되어 있었고 이것은 당연히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움직임이 없는 뻣뻣한 사진에서 움직임이 있는 자연스러운 사진으로의 변화는 뉴스사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1910년대를 한국 포토저널리즘의 발아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19년 3월 1 일 독립운동을 기화로 일본은 무단통치가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이른바 문화정책을 펴기로 했다.

3·1운동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회유와 협박으로 그들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는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참여속의 투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제에 협조하는 번뇌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들이 내세운 문화정책은 일종의 기만전술에 불과했으며 실제로는 전보다 더 심한 통제를 가했다. 1920년 그들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신문발행을 허가했다. 한일합방 이전에 활기찼던 한국언론이 합방으로 모두 폐간되어 버리고 난 후 꼭 10년만의 일이었으니 어찌 보면 일제가 한국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들은 신문 발행을 허가해 놓고 검열과 처벌은 더욱 강화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전후한 포토저널리즘
유럽과 미국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꽃피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는 전쟁피처사진이 많은 지면을 차지했고, 종전 후에는 신문지면이 대부분 타블로이드판으로 바뀌었다. 1면에는 큰 사진을 매일같이 게재하여 시각적인 지면을 눈에 띄게 확대시켜 편집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포토저널리즘은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이러한 구미 선진국의 포토저널리즘의 발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언론계의 실정이었다. 나라와 주권을 빼앗긴 암울했던 시대는 19210년대에 들어서 민족지인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창간되면서 막연한 희망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이 고난의 시대를 기록하여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민족지 때문이었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했던 1930년대에 구미선진국에서는 순수한 사진전문잡지인 라이프(Life), 룩(Look)이 창간되어 보도사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가 청일, 러일전쟁을 벌이면서 한국은 사슬에 더욱 얽매여 찬란한 문화 유적은 있으나 이를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사진가들이라고는 사진관에서 일하던 인물 사진가뿐이었고 민족지 조선·동아에서도 일본인 보도 사진가가 사진을 담당했으니 그때의 한국보도사진을 논하기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동아·조선이 존재함으로 해서 희망이 있으니 기다려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저항의 방법도 지능적이 되어갔다. 민족의 실낱같은 희망과 새소식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민족지의 사명이 매우 컸다.

 

1936년 제11회 올림픽대회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자 히틀러는 이 올림픽을 세계정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이 올림픽에서 한국의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 우승의 월계관을 썼다. 비록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우승했지만 같은 피를 나눈 한민족이기에 전 한반도가 열광했다. 1936년 8월 9일 이 우승소식을 접한 동아일보는 민족적인 울분을 참지 못해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서있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8월 25일자 사회면에 게재했다. 손기정 선수의 세계제패는 일제의 억압에 시달리던 한민족에게 커다란 희망과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일장기를 말소했던 동아의 편집자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올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 이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인공은 당시 체육담당 이길용(李吉用) 기자와 삽화담당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이었고 이에 연루된 사람은 사진부장 신낙균, 사진제판담당 백운선, 서명호, 사회부장 장용서, 잡지부장 현진건, 최승만 등 8명이었다.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40여일 만에 풀려났으나 동아일보에의 복직은 불허됐다. 이 사건 이전에 민족지인 조선중앙일보가 8월 13일자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했었으나 그때는 그대로 지나쳤던 일이 동아일보사건으로 하여금 자진 폐간하게 만들었다. 광복 후 건국에 이바지했던 여운형(呂運亨) 선생은 1933년 2월부터 조선 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날카로운 필치로 매국노를 규탄했다. 동아·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은 움츠러들었던 민족정기를 진작시키는 전기를 마련했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4) 8·15해방 이후의 포토저널리즘


외세에 시달리던 한국신문과 더불어 보도사진도 형극의 길을 걸어왔다. 사진술은 1883년 한국신문의 여명기에 함께 등장하여 한일합방을 전후해서는 기술적 측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나 질적 측면에서는 일제의 꼭두각시놀음을 한 셈이었고, 1920년대에 들어서 민족지 동아·조선시대를 거쳐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6·25동란을 겪으면서 한국의 포토저널리즘은 세계적인 포토저널리스트로 인해 비약적인 도약을 한다. 물론 국내신문보다는 외신을 통해 한국전쟁의 양상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세계의 보도사진가들과 함께 생활하게된 한국의 보도사진가들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은 어려움을 뚫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능직으로만 여겨졌던 사진기자도 공채를 통해 뽑기 시작하자 양적, 질적으로 급성장을 하게 된다. 그 동안 대부분 신문사가 사진기자를 공무국 소속으로 편제했던 제도를 고쳐 편집국 소속으로 한 그 자체부터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 이후부터 정부가 국가안보문제를 내세워 언론을 통제하자 사진기자의 취재영역이 극도로 축소되었다. 특히 취재기자보다 쉽게 노출되는 보도사진가들은 숱한 수난의 길을 걷게 된다. 4·19혁명을 시발로 계속되는 시위와 전투경찰의 진압상황은 보도사진가를 마치 전쟁터의 종군기자와 같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게 만들었다. 항상 삼엄한 제약을 받으며 뒤떨어진 사진기재를 들고 사건현장에 접근해야 했기 때문에 사진기자들은 수난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 포토저널리즘의 변모를 편견 없이 기록하고자 한다.

미군정하의 언론자유와 포토저널리스트
일본의 패망으로 일제치하 36년의 암울한 시대가 청산되고 주권과 자유를 되찾은 기쁨도 잠시뿐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려 정치·사회적 무질서가 팽배하게 되었다. 그런 사회적 상황에서 민족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성일보, 대한독립신문, 민중신문, 대동신문 등의 우익계 신문과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자유신문, 중외신보, 해방일보 등의 좌익계열신문들이 창간되었다. 그리고 영자지 코리아 타임스(Korea Times)와 서울 타임스(Seoul Times)도 발간되어 언론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만큼 언론사가 난립했다. 미군정청은 언론자유정책 아래 신청만 하면 언론사의 설립을 허가해 주었기 때문에 우후죽순처럼 신문들이 창간됐다. 그러나 대부분 신문사들이 일제하의 기획·편집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보도사진의 효율성이나 필연성을 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신문사에서는 대부분 일본인 사진기자들의 사진만을 취급했기 때문에 포토저널리즘을 제대로 알고 있는 보도사진가는 극히 드물었고, 또 짧은 시간에 사진기자를 육성한다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당시 2~3개 신문사의 보도사진가 몇 명을 빼놓고는 카메라 조작법만 알면 사진기자로 발탁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극적인 사진을 찍었다 해도 현상·인화에서 망쳐버려 좋은 기록들이 사라져 버리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당시 신문사 사진기자로 소속되어 있던 인원은 20~30명 정도였는데, 이중 미군정청이 발급한 프레스 패스(Press Pass) 지참자들에게만 어느 곳이든지 취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 석조전에 있었을 때 장소가 협소하여 시행하게된 풀(Pool)제도가 한국 최초의 공동취재였다. 이를 계기로 풀제도가 유효적절하게 시행되어 대부분의 신문들은 풀사진을 많이 게재했다. 이 당시의 신문은 좌우익의 정치적 대립과 군중시위, 독립투사들의 추모기사와 함께 인물사진을 주로 게재했다. 남북 분단시대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의 신문사진은 제대로 정착하기 어려웠다. 그 후 1950년 1월 28일 한국 최초의 사진전문 주간지 사진뉴스가 박진식(朴璡植)에 의해 창간되면서 한국 보도사진의 새장을 열었으나 6·25동란과 함께 다시 침체기를 맞이했다.

6·25동란 시기에 핀 포토저널리즘
6·25전쟁 동안 한국의 포토저널리즘은 칠흑 같은 밤길을 헤매야 했다. 당시 각 신문은 국방부 소속 종군사진반에서 취재한 사진을 게재했고 종군기자를 내보낸 신문사가 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모든 신문이 여전히 사진게재에 인색했을 때에도 중앙일보만은 독자들이 사진신문이라 부를 정도로 많은 사진을 크게 싣는 유일한 신문이었다. 6·25동란은 보도사진의 암흑기를 형성한 동시에 한국의 보도사진이 서구 선진국의 보도사진기법을 직접 전수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장에서 분골쇄신하는 선진국 보도사진가들의 활약상을 보면서 종전 후 한국 사진기자들은 한국의 독자적 보도사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파괴되어 다시 복구되기까지 수년이 걸렸으며 그 동안 언론은 그 기능을 상징하고 있었다. 전쟁의 아픈 상흔이 아물기까지 각계 각층에서 분출된 욕구를 제대로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언론계의 실정이었다. 또한 뿌리 깊은 기사 우월주의 사조로 인해 보도사진의 존재 이유마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주나 편집자의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사진가는 자율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편집국의 필요에 따라 사진을 제공만 하는 기능적 요소로 전락했다. 6·25동 란은 열악한환경과 여건에서 출발한 한국의 보도사진가들이 서구의 포토저널리즘과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동란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온 세계적인 대보도사진가들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이 황폐해져 가는 과정을 섬뜩하리만큼 리얼하게 기록했다. 한국 보도사진가는 그들의 최신 사진기재와 사진기법을 감히 따라갈 수 없었다. 서구의 보도사진가들은 전쟁의 참상은 물론이고,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들의 렌즈에 잡힌 한국의 모습은 다양한 시각으로 투영되었다. 1·4후퇴당시 폭격 당한 대동강 철교를 목숨걸고 넘어오는 피난민을 찍은 막스 데스포,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을 담은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 후방민중들의 애환을 찍은 마거릿 버크 화이트, 유엔군을 따라 압록강까지 종군하여 전쟁의 참혹함을 리얼하게 담은 칼 마이던스 등은 모두 세계적인 포토저널리스트였다. 그들의 사진 모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도사진이 되었다. 전쟁동안 신문이 거의 폐간된 상태였지만 한국 보도사진은 여명기를 맞이했다. 우리나라 사진기자들은 자사가 종군시킬 능력이 없음을 알고 외국 유명통신사나 유엔군 종군기자로 활약을 했다.

정의를 지킨 보도사진(휴전에서 4·19혁명까지)
1953년 7월 휴전이 되자 일간신문들도 이듬해부터 정상적인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가난에 찌든 국민들은 국론이 나뉘고 관리의 부정부패가 커지자 언론이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보도사진의 영역도 점점 넓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언론에 한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언론의 힘이 사회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55년에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인 민주당이 창당되었고 다음 해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등 정국은 활기를 찾게 되었다. 이와 함께 신문 보도사진기자의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정치구호를 앞세운 민주당의 한강백사장 유세장에 30만이나 운집한 사진을 각 신문은 경쟁하다시피 크게 게재했다. 또 이듬해인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과 장충단공원 민주당 강연회 폭력사건 등은 사진기자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보도되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되었다. 1958년부터 일간신문들은 증면하기 시작했고 조석간을 병간하면서 사진게재면을 넓혀 보도사진가의 영역이 넓어졌다. 1958년 5·2총선거(제4대 민의원)를 실시하면서 신문지면이 갖가지 선거부정 기사로 채워지고 있을 즈음 경북 영일 개표장에서 집권당인 자유당이 전기를 끄고 표도둑질 하는 결정적 순간이 동아일보 보도사진가 이명동(李命同)에 의해 찍혀 부정선거 결과를 완전히 뒤집은 일도 있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보안법 통과를 저지하려는 야당의 의사당 농성사진이 신문에 크게 실려 국민의 많은 지지를 받았는데 이는 보도사진의 진수를 유감없이 발휘한 쾌거 였다. 1960년 자유당 정권 말기,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의 사망에 따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저질러진 3·15부정선거로 민심은 자유당정권을 떠났고, 3·15부정선거 규탄 데모사진이 연일 신문을 채웠다. 시위의 규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는 유혈사태까지 빚었다. 대구, 마산에서의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일반인과 대학생은 물론이고 중고등학생까지 가담했다.

특히 마산에서 경찰이 난사한 최루탄을 눈에 맞고 바다에 버려졌던 고등학생 김주열군의 시신이 인양되어 이 사진이 신문에 보도되자 온 국민들은 분노에 떨었다. 한 발의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듯이 이 한장의 사진은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다. 보도사진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준 예다. 4·18 고려대 데모대를 정치깡패들이 습격한 처참한 현장사진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자 4·19 학생민주혁명의 물줄기는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4월 19일 데모군중이 경무대 대통령관저를 향해 나아가자 무장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경무대 앞은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당시 각 사의 사진기자들은 빗발치는 총탄의 위협을 무릅쓰고 유혈현장을 취재, 보도했다. 격전을 치른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경무대앞 유혈현장 사진중 동아일보의 이명동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 가장 뛰어난 사진으로 꼽혀 오늘까지 그 역사의 현장이 잘 보관되어 있다. 이 발포사건으로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질서가 회복되었을 때 동아일보에서는 민주혁명의 기록이라는 화보집을 발행하여 무려 15만부나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4·19혁명을 분기점으로 해서 보도사진은 절정에 달했으며, 우리나라의 보도사진가들도 가장 의욕적으로 활동한 시디였다. 6·25동란을 체험했던 보도사진가들은 세계적인 보도사진가들 못지않게 역사적인 사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록해 놓았다. 오늘날 이 사진들은 모두 남아있어 60년대 독재정권의 실상을 한눈으로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더욱이 보도사진가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준 일이 일어났다. 서울시에서 1960주관하여 매년 시행되고 있는 서울시 문화상에 언론부문을 추가한 첫해의수상자가 보도사진가였다. 자유당의 부정선거와 4·19혁명을 극명하게 기록한 몇 장의 사진이 한국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생각할 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1961년 12월 제 10회 서울시 문화상 언론부문상이 동아일보의 사진기자 이명동에게 주어진 것은 한국 보도사진가의 위상을 정립시켜 주었으며 대학졸업자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4·19혁명은 보도사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으며, 사진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진신문이 발간되기도 했다. 1960 년 7월 사진신문, 국내사진 보도 등이 순간지로 나왔고 1961년 4월 4면으로 된 주간지 고려사진신문이 있었으나 오래 발간되지는 못했다. 독재체제에서 자유를 구속받았던 민중들은 4·19혁명으로 욕구와 불만을 산발적으로 표출했고 정치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회가 혼란해질수록 보도사진가들은 바빠졌다.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은 제한을 받지 않고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이에 고무된 보도사진가들은 현장기록에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능력을 발휘했다. 이 시기야말로 보도사진가의 진가를 확실하게 보여준 때였다. 부정, 불의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언론매체는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고, 생생한 보도사진은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3·15부정선거 및 4·19혁명을 기록한 보도사진가는 알 권리와 알릴 의무를 동시에 수용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보도사진가는 정치·경제·문화·사회현장의 파수꾼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인정받게 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4·19혁명이후의 정권은 허약한 정치적 배경 때문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문민정치 시대의 종말과 군부 철권시대의 개막이라는 변화 속에서 보도사진가의 입지는 고난의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 보도사진의 한계
자유당 말기와 4·19민주혁명을 기점으로 꽃을 활짝 피웠던 한국 보도사진은 5·16군사쿠데타와 함께 서서히 외압에 의해 시들기 시작했다. 또한 여론정치의 필요성을 깨달은 군부세력들은 언론에 통제의 메스를 가하기 시작했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각 기관 출입을 제한하고 사진촬영금지구역을 설정하여 공식적으로 보도사진가의 근접을 사전에 차단해 국민의 알 권리와 기자의 알릴 의무를 제한하기에 이른다. 또 집권 군부는 과감하게 사회부조리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언론인을 투옥하기도 했다. 이때 언론통제라는 용어가 등장했으며 힘에 의해 정권을 잡은 군부세력은 이완된 민심을 수습하고자 언론통제를 교묘하게 활용했다. 5·16군사쿠데타의 당위성을 홍보하기 위해서는 취재편의를 최대한 보장하는 반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하는 취재에 대해서는 국가안보를 내세워 통제했다. 1963년 한일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군부정권은 언론통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 국민의 알 권리와 정치 참여권을 침해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자유로운 취재활동을 교묘하게 탄압했다. 5·16군사쿠데타 이전에는 기사나 사진에 불만을 가진 권력자들의 무언의 외압은 있었으나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 이후에는 정보부로 연행되는 예가 허다했다. 1963년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거세지면서부터 정부기관에서는 국가안보를 내세워 언론을 통제했다. 군사정권의 언론통제속에서 정치면의 보도사진은 무기력했으나 신문의 사진을 중요시한 각 언론사들은 새로운 기재와 수준 높은 보도사진가를 증원해갔다. 1960년 전후 각 언론사의 사진기자 수는 3~4명으로 전국적으로 50여명에 불과하던 것이 1965년까지 250여명으로 늘어났고 1965년부터 대학졸업자 공채제도가 정착되어 고학력 보도사진가가 주류를 이루어 갔다. 또 인쇄시설도 단색 윤전기에서 컬러 윤전기로 대체, 1960년에 조선일보는 컬러사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각 사에서는 사진장비의 현대화가 경쟁하듯 이루어졌다. 1965년에는 한국 신문사상 처음으로 종군기자단이 월남전에 특파되었다. 1966년에는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1967년에는 서울, 한국, 경향, 신아, 코리아헤럴드의 사진기자들이 특파되어 취재경쟁을 벌였다. 각 언론사에서는 이들이 보낸 생생한 사진을 게재했으며 월남파병 장병들의 전투사진을 많이 남겼다. 현대신문의 본질은 문자로 된 기사보다는 보도사진이 우선한다고 생각할 때, 유신시대의 보도사진은 존재 자체마저 무시당할 만큼 제대로 취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권력은 사회의 부정·부패사건을 취재해도 언론사의 간부선에서 통제하도록 조종하기에 이르렀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탈법현장을 찍었더라도 그 보도사진은 신문에 게재될 수 없었다. 이 시대에는 사진가는 있어도 진정한 보도사진은 찾기 힘들었고, 사진은 있으나 살아 움직이는 사진은 없었다. 


포토저널리즘  NO.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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